사루비아 <Studio Project 3_정다정×함진>

2023.10.25. - 2023.11.12.

이준형


가벽이었던 것은 옆으로 뉘여 좌대가 되었고, 몇 가지 미소한 사물들이 거기 기대어 있다. 그에 맞춰 시선은 눈높이보다 아래로 내려와야 하며 또 다시 건너다봐야 한다. 어떤 사물들은 보는 이에게 시점을 변환할 것을 요구한다. 낮은 데 놓인 것을 보기 위해 몸을 굽히고 다시 일어나 거니는 동안 신체는 동선의 자유로움을, 연속적이고 리드미컬한 운동감을 만끽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엔 어떤 도약의 순간들이 있다. 요컨대 충분히 가까이 다가선다면 손바닥 만한 정다정 작가의 조각은 그의 기억이 상연되고 변형되는 무대로 나타나며, 한 점 얼룩과 같은 함진 작가의 조각은 돌기들을 뻗으며 괴물적인 생명력을 드러낸다.

정다정 작가는 지도를 통해 본 장소의 이미지와 그 곳에 직접 다녀왔던 기억을, 금속제 공업용품과 자연물을 한데 겹쳐 특정한 장면을 구성해왔다. 이 과정은 감정적, 혹은 물리적으로 너무 가까운 곳에서 물러나 사태를 조감의 시점으로 관망하는 것, 그리고 다시 대상에 다가가 그 크기를 감각한 대로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것을 포함한다. 정확한 비례에 따라 지형 간의 관계를 도식화하는 지도와는 달리, 작가가 만들어낸 장면에서 때로 지반은 너무 좁고 거기 얹어진 마른 꽃가지는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목재 합판 대신 석고를 주로 활용하는 최근 작업들은 오목한 판 위에 작은 조각들이, 혹은 역으로 부서진 파편들 위에 비교적 단단한 판이 겹쳐져 있다. 작가는 한 물질 위에 또 다른 물질을 얹으며 조형성의 가장 근원적인 층위에서 실험한다. 서로 이질적인 소재와 시점들을 맞붙여보고 또 쌓아보는 이 작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경도硬度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함진 작가는 사루비아의 개관전이기도 한 첫 개인전 《공상일기》에서 작은 장난감을 파내 생긴 단면에 특정한 장면을 삽입하기도 하고, 찰흙으로 만든 미세한 신체 부위들을 접합시켜 기이한형상을 구축하기도 했다. 이렇게 제작된 미물 들은 연탄재의 구멍이나 다른 오브제의 언저리, 전시장 곳곳의 틈새에 놓여 상상적인 상황들을 연출했다. 이후 미세한 부분들의 군집은 보다 추상화된 형태로 개별 작업의 표면으로 옮아갔다. 작가는 주된 매체인 폴리머클레이를 빚어 한때 그 자체로 제각기 하나의 도시, 혹은 행성인 큰 크기의 검은 조각 들을 만들기도 했고, 이내 다시 작은 크기로 기관이 과잉 증식해 신체를 뒤덮은 듯한 비 인간의 형상들을 제작해오고 있다. 그가 거쳐온 작업의 궤적에서, 그리고 언젠가 그가 크다는 것과 작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에서 보듯, 이를테면 ‘초소형’ 조각들로 알려진 작가는 단지 규모의 크고 작음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최근 작업한 작은 조각들은 구체적인 인체의 형상이 제해진 채, 유기적 형태들이 뒤얽혀 응축된 알과 같은 모습 이다. 시선에 걸린 부분 주변으로 한 눈에 그러모아지지 않는 다른 부분들을 계속해서 남겨두면서, 이 작은 알들은 공간과 크고 넓은 면적으로 접해 있다.

두 작가의 작업은 신체가 안착해 있는 시공간의 축척을 변형하고 다른 세계로 들어설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전시는 서로 배타적인 평행세계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정다정 작가는 석고 반죽을 전시장 벽에 발라 작업의 토대와 관람자가 직접 마주보게 하고, 바닥에 둔 조각 밑으로 흐르다 굳은 안료는 작업과 공간의 접면을 불분명하게 연장한다. 또 다른 무대가 될 수 있었을 석고 판의 파편들은 전시장 구석의 그물에 걸려 있고, 더욱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된 작업의 잔해들은 전시장의 하단 몰딩 위의 작은 틈에 자리잡고 있다. 함진 작가의 조각 역시 좌대 위에 개별 작업들이 선보이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상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넓은 좌대 위에 따로 혹은 같이 놓여 있으며, 허공에 걸려 배경의 전시장 공간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기도 한다. 또한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벽 위로 확산하고 있는 정다정 작가의 석고 페인팅 아래에는 함진 작가의 조각이 놓여 두 작업세계의 접점을 만들기도 한다. 몸을 얻은 작업은 누군가의 기억이나 공상으로만 남아있을 수 없으며, 공간 속에서 제 나름의 삶을 전개해야 했다.

모든 작업이 하나의 작은 세계라는 순수한 믿음을 견지하더라도, 전시장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들 사이로의 경과의 감각이다. 신체는 작은 세계로 접어들고 다시 빠져나오길 반복한다. 이 세계는 저 세계에 대해, 저 세계는 이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암시한다. 어쩌면 이 모든 세계들을 경유하는 것은 매번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으로 돌아오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이며 이곳은 어디인가? 두 작가의 작업들은 내가 시선을 주고받을 대상은, 내가 딛고 서서 움직일 수 있는 지반은 어디쯤 존재하는지 다시 감각하길 요구한다. 그 대상은 아주 작거나 클 수도 있고, 그 지반은 아주 연약하거나 단단할 수 있다.


* 이선화, “미술가 함진”, 「네이버캐스트」 2009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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