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정의 세계 만들기
- 정다정의 첫 개인전 《장면 SCENE》을 들여다보며

김명진


정다정을 처음 만난 것은 2023년 11월 그의 작업실에서였다. 작고 연약한 부스러기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사람, 혼자서는 힘을 받지 못할 무용한 개체들을 모아 유의미한 덩어리를 만들어가던 사람의 단단한 분위기를 기억한다. 당시 그는 어려운 도전을 마친 후였고, 이전까지 쌓아 온 궤적들을 흐트러뜨리면서 치열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새로운 단계가 올 때 그러하듯이 그에게도 깊은 고통과 부푼 기대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그가 개인전을 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당시에는 머릿속으로 좀처럼 그려낼 수 없었기에 더욱 기대되었던 것이 정다정의 개인전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 그의 개인전은 실재하는 장면이 되어 눈앞에 도달했고 나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볼 책무를 맡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정다정이 ‘장면’을 조각하는 작업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일을 ‘세계 만들기’라고 지칭하며 이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정다정은 하나의 대상을 만드는 것보다는 여러 대상의 관계를 조직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어떠한 세계를 보여주려 한다. 이러한 ‘세계 만들기’를 수행하려 할 때에는 본인만의 언어라고도 할 수 있을 몇몇 특이한 습관들이 발현된다. 그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한 법칙, 마치 자음과 모음 같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습관들에 주목하여 그 세계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1. 풍경속풍경속풍경
   《장면》의 시작점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업은 <장면 000-풍경속풍경속풍경>(2024)이다. <장면> 시리즈의 첫 부제인 만큼 ‘풍경속풍경속풍경’은 지금 시점에서 정다정의 작업 세계를 함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정다정에게 작업이 시작되는 순간은 일상의 눈높이에서 벗어나 “흐린 눈을 뜨고 멀리 보는” 것과 맞닿아 있다. 그는 새의 시점에 가깝게 높아지거나 먼지와 가깝게 내려앉는 식으로 ‘실제 크기’의 세계와 멀어지면서 작업해 왔다. 그의 세계에서 하나의 장면은 축소되거나 확대되며 종종 여러 크기의 버전으로 복사, 갱신되곤 한다. 서로 다른 시점과 거리로 감각되는 풍경들이 공존하는 상태가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형식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또 다른 요인은 하나만으로는 어떠한 요소로도 여겨지지 않을 법한 것들을 모아 단위로 만들고, 군집시킴으로써 존재감을 부여해 온 그의 습관이다. 이에 따라 세계들 또한 군집한 것이다. 그렇게 각각의 부분이자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세 개의 판, 세 개의 세계를 겹겹이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상태에서 전시가 시작된다.
   <장면 000>은 다른 장면들과의 연결고리를 두어 전시 전체에 관한 미리보기를 제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기서 미리 볼 수 있는 요소는 주로 질감과 행위에 관한 것이다. 맨 안쪽의 지층은 큰 판을 일부러 깨지게 하여 그 상태를 관찰할 수 있게 두었는데, 이는 재단된 형태와 우연히 만들어진 형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 나가려는 작가의 태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중간의 지층은 이끼처럼 흩뿌려진 색깔의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 깨진 판, 색이 크림처럼 발라져 있는 상태와 가루가 되어 흩어져 있는 상태 등을 포함한다. 맨 바깥쪽의 틀은 마치 회화의 표면처럼 그러나 조금 거칠게 마무리되어 있다. 이처럼 첫 장면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재료들과 물성을 표현하는 방식들을 전반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
   전시 공간인 레인보우큐브 또한 크게 세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어, 새로운 방에 들어설 때마다 장면 하나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정면에서 왼쪽 방에 들어서면 보이는 <장면 001>(2024)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인 신작이기도 한데, 작가는 여기서 “작업보다 더 작업 같은 작업대”, 즉 내용보다 더 내용 같은 배경을 옮겨 오려고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정다정의 세계에서 배경과 그 위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작업실과 작업이 명확하게 분리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작업 환경이 곧 작업이 될 때가 있어서, 그 환경을 통째로 들고 오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딜레마를 마주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에 따라 그는 점점 더 전시 현장에서 작업의 많은 부분을 진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현장에서 재료들과 호흡하다 보면 물질의 다양한 상태를 한데 담아내기가 용이해진다. 이를테면 그의 작업에서는 석고 하나를 쓰더라도 고운 가루의 상태부터 가루들이 뭉쳐졌을 때의 작은 덩어리들, 면을 이루는 상태가 함께 존재한다. 조소 재료와 회화 재료를 뒤섞어 사용하고, 캔버스 천을 말아서 조각 위에 올리기도 한다. 마른 꽃이나 재처럼 생명의 흔적을 간직한 채 사물이 되어가는 존재들이 그 위에 더해진다. 멈춰 있지만 소란스러운 이 “작업대 같은 세상” 위에서는 부스러기 하나조차도 등장인물로 여겨질 만하다.


2. 대기실-등장인물
   이번 전시에서 정다정은 ‘멀리서 보기’만큼이나 ‘가까이서 보기’ 또한 그의 세계에서 중요한 지점임을 보여준다. 큰 덩어리 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으로 머물렀던 이들을 위한 친절한 진열장을 마련해 각자 개별적인 캐릭터로 조명될 수 있게 배치한 것이다. 이 대기실에는 주변 인물들의 성격이나 어떤 순간을 모티브로 한 작은 조각과 작은 회화, 혹은 작업실의 삶으로부터 비롯한 ‘뽀시래기’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다. 이를테면 <평온한 사람>은 수평-수직을 맞춰 주는 물건에서 마음의 균형을 잘 맞추는 사람의 특성을 떠올린 것이고, <연약한 사람>은 작업 과정에서 떨어져 부서진 것들을 모아 하나의 체스 말처럼 만든 것이며(이는 그들에게 전진할 또 다른 삶을 부여하는 제스처와 같다), <눈물 고인 사람>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언젠가 작업이 될’ 것으로 여기던 오브제에 눈물방울을 더해 미리 진열해 둔 것이다. 이렇듯 개성 강한 캐릭터들로 와글와글한 진열장의 맨 위에는 어김없이 <멀리 보는 눈>이, 우리가 걸어 다니는 세상을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새의 형상으로 놓여 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관조하는 태도로 바라보고 싶다는 듯이.
   <대기실>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지금껏 정다정의 작업에서 어디까지 봐야 할지 몰라 간과하곤 했던 작은 입자들 하나하나가 다 세심하게 들여다볼 여지가 있는 조각들이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가루들까지 전부 다 읽어낼 수는 없겠지만 모든 것이 다 읽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의 세계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들조차 단지 우리의 신체에 비해 크기가 작을 뿐, 모두 다 성격이 있는 친구들이다. 모순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정다정은 ‘위에서 내려다보되,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본다.
   또 하나 확인하게 된 사실은 정다정은 언제나 삶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의 일이나 네트워킹, 친밀한 인간관계,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은 그의 작업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작업 안에서 주변인의 이름을 부르고 자기 눈으로 확인한 그들의 특성을 뒤섞어 녹여낸다. 삶이 작업에 묻어나는 것이 작가들에게 당연한 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때때로 생활과 작업 세계는 분리될 수 있으며 작업 세계만을 위한 서재가 따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재보다는 자신이 처한 환경 자체에서 영감을 얻는 정다정에게는 그렇지 않다. 아마 그는 간접 경험보다는 신체를 경유한 직접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더욱 무게를 두며 이를 작업 안에 축적해 나가고 있을 것이다.


3. 그릇 위에서 흘러 다니는 요리
   ‘그릇 위에서 흘러 다니는 요리’는 이번 전시를 전반적으로 보고 특히 <장면 003>을 보았을 때의 인상을 표현한 것이다. <장면 003>은 작가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업이자 가장 많은 즉흥적 에너지를 허용한 결과물이다. 이 작업을 보면서 ‘(본인의 작업에) 완성이라는 것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데, 그건 작업이 미완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어딘가로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정다정의 작업을 보며 자꾸만 맛깔나는 요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마 이번 전시의 작업들은 대개 판 위에 요소들이 올라가 있는 형식이며, 살아있었던 흔적이 있는 재료들이 그 위에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펼쳐낸 그릇에서는 나뭇가지와 건조된 식물들과 꽃가루와 미술 재료의 가루들이 한데 혼합되면서도 각자의 목소리를 낸다. 심지어 이 재료들을 사용하는 방식들은 앞으로 더 정교화될 여지가 많은데, 이를테면 일부러 말린 식물과 말라버린 식물의 차이 같은 것을 예민하게 구별해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행한 요리 서바이벌에서 본, ‘그릇 위에 의도되지 않은 요소가 올라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심사위원의 말이 뇌리에 남은 채로 정다정의 플레이트를 보았다. 그의 경우 즉흥성이 짙게 느껴지는 작업에도 사실은 정밀한 판단이 반영되어 있으며, 불필요한 요소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릇 위에는 색과 질감, 물성의 균형을 생각하며 배치한 요소들이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여러 행위들의 흔적으로 놓여 있다. 요리와의 결정적 차이는 그것이 놓인 그릇 자체가 내용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이다. 정다정의 그릇은 부분적으로 깨지기도 하고 깨진 것들이 모여 다시 새로운 부분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작 과정에서 작가는 우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만, 우연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태도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주목하여 보면 그의 작업에서는 원 상태 그대로 보존되는 것보다도 움직임의 가능성에 대응하는 유연함이 더 주된 요인으로 읽힌다. 먹어서 사라지는 음식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시간을 중요한 축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장면 003>의 옆에는 방 속의 방이 있는데, 전체 공간보다 조금 높이 올라와 있어 <Ceramic Flower>(2024)만을 위한 사색의 공간으로 느껴진다. <장면 003>에서 한껏 보여주었던 과감한 제스처가 생략되고 오브제 하나를 조용히 바라보게 되는 이곳은 기억의 방, 기원의 방이기도 하다. 좋았던 기억의 단면을 정성스럽게 배치하자 삶의 궤적을 물려준 가족의 흔적 또한 그곳에 남았다. 깨진 도자의 단면을 이어 붙여 만든 비정형의 욕조 안에 가만히 기대어 있는 마른 꽃은 작가가 사용한 다른 식물들의 모양이 그러하듯이 은근한 곡선을 띤다. 이렇듯 곧게 뻗은 직선보다는 제각각의 모양으로 구부러진 곡선의 오브제들(혹은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것이 이번에 그가 만들어낸 장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된다.

   지금까지 들여다본 정다정의 세계에서는 실제 크기의 세계와 멀어지는 것, 배경과 내용을 크게 구별하지 않는 것, 멀리 떨어져서 봄과 동시에 아주 가까이에서 보는 것, 신체를 경유하여 얻은 직접 경험을 예민하게 반영하는 것, 시간의 흐름에 따른 움직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 홀로 서 있을 수 없는 은근한 곡선들이 서로를 지탱하게 하는 것 등의 습관적인 언어가 발견된다. 여기에 묘사된 첫 개인전의 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어떤 언어는 정착되고, 어떤 언어는 사라지거나 변형될 것이다. 앞으로는 그가 다양한 재료의 예민함에 어떻게 대처하며 다루는 방식들을 정교화해 나갈지, 흘러가는 시간에 따른 물성의 변화를 어떻게 작품의 새로운 삶으로 전환해 나갈지 기대된다. 그의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하고 그 속에 푹 잠기게 될 날을 다시 한번 기다리기로 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