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정 개인전 《장면 SCENE》

2024.9.28. - 2023.10.13.
레인보우큐브

김정아


정다정은 '장면(scene)'을 조각함으로써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지표가 될 기억과 감각을 길어 올린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주변 풍경과 사물을 수집하며 그들과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하나의 장면 속 배경과 인물로 등장시킨다. 정다정의 개인전 《장면 SCENE》은 ‘장면’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를 공간 속에 펼쳐내어 이를 네 개의 장면으로 엮어나간다. 극장의 공간 구성을 빌려온 전시는 각각의 장면이 놓일 무대 공간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위한 대기실을 설정해 이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전시장에 들어와 처음 마주하는 공간이자 각 방을 하나의 공간으로 잇는 거실에는 여러 풍경이 포개어져 집합적 장면을 이루는 「장면 000-풍경속풍경속풍경」이 자리한다. 부분의 집합을 통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군도와 같이 작품 속 세 개의 층은 방에서 마주할 세 개의 풍경을 품는 동시에 그 자체의 정경을 이룬다. 발치에 넓게 펼쳐진 풍경은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시점으로 관객을 위치시키며 작가 자신과 대상 사이의 가장 적정한 거리감을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정다정에게 특정한 시점과 거리감을 설정하는 것은 삶을 대하는 예술적 태도이자 작품에 보이는 삶의 태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기에 중요하다. ‘장면’ 시리즈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은 지평선보다 더 높은 곳에서 출발해 영도(零度)에 가까운 지점까지 내려앉고는 한다. 이는 그가 일상의 눈높이에서 벗어나 지상을 아우르는 시점을 취했을 때 전체 중 일부로 자리 잡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했던 경험을 계기로 “한 발짝 벗어나 먼 거리에서 머무르는 시선을 유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는 확대와 축소의 행위를 반복하며 먼 것을 가까이 가져와 느끼고, 가까운 것을 멀리서 보고자 한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질 때 생기는 경험과 감각의 간극에는 예술적 상상력이 파고든다. 그렇게 매워진 간극은 다시 일상의 토대가 되어 예술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장면 001」에서는 단단하게 고정되어야 하는 지지대가 갈래갈래 부서져 있고, 마른 꽃, 얇은 나뭇가지, 색 가루와 색 덩어리, 재와 같이 물리적으로 연약한 오브제가 표면을 덮고 있다. 이는 조각이 갖는 견고함에 대해 고민해 온 정다정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던 작고 연약한 것들을 수용하여 작품으로 체화한 결과이다. 체화는 작업 과정에서 진행된다. 그는 잔류하는 감각을 드로잉을 통해 추상적으로 형상화하고, 그림을 일으켜 세워 물성이 섬세하게 응집된 조각으로 변모시킨다. 그 과정에서 가루나 부스러기를 쌓고 더해나가다 이들이 깨지고 부서지면 폐기하거나 대체하기보단 또 다른 조형 요소로 받아들이며 다시 이어 붙여간다. 흩어진 것을 한데 모아 덩어리를 만들었다가 의도적으로 해체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재료에 새로운 성질을 부여하고 동시에 그것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속성을 작품 자체의 속성으로 확장한다.

「장면003」은 여느 장면과 다르게 특정 풍경의 형상화가 아닌 작가가 어떤 순간을 떠올리며 취한 여러 제스처가 남아 구성된 장면이다. 그는 자신이 삶으로서의 예술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금의 일상이 그 둘의 불가분한 관계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던 순간을 떠올린다. 작업하는 행위는 곧 삶을 살아내는 행위가 되고, 일상의 태도는 작품에 담긴 손짓을 통해 투영된다. 흩뿌리며 뒤섞고, 산산이 부수어 틈을 벌려 흘리고, 끼워 넣는 그의 손짓은 교차와 혼재의 손짓이 되며, 이러한 행위에서 시작된 「장면 003」은 다른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장면으로 다시 확장한다.

수집된 풍경에 그때 남은 인상과 그곳에서의 이야기들이 더해져 소란스러운 무대가 형성된다면, 다른 한편에는 수집된 사물들이 자신의 무대를 기다리듯 자리 잡고 있다. 정다정의 작품에서 인물은 장면 내부에 위치하여 크기와 시선을 가늠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인물 개별에 집중해 그들을 큰 장면으로부터 분리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각자의 공간이 마련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대개 작가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그는 이들과 관계에서 삶의 추동력을 얻는다. 이러한 존재들을 관찰하며 ‘연약한 사람, 큰 사람, 반짝이는 사람, 눈물 고인 사람, 불붙은 사람...’들을 발견한 작가는 깨진 세라믹, 마른 꽃, 알루미늄 껍질, 얇은 나뭇가지, 금속 부품, 파편으로 남은 색 조각과 같이 손에 익은 자기 주변의 오브제에 이들에 대한 애정을 조형적 아름다움으로 드러낸다.

정다정이 길어 올린 기억은 추상적인 상상력을 통해 삶의 분명한 지표가 되고, 그의 예술은 다시 마주하게 된 순간들을 살결과 가장 가까운 감각으로 바꿔놓았다. 형태를 가질 수 없던 것에 실체를 부여해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는 그의 여정을 들여다보며 삶과 예술이 맞닿아 있음을 충만하게 느낀다면 우리 역시 정다정의 수많은 ‘장면’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발치에 있던 작품은 ‘나’의 무대가 되고 세계가 되어 우리가 길어 올릴 기억과 감각들을 다시 한번 뒤바꾼다.